언론 속 살림

2020[은평시민신문] <주치의 일기> 딸 부잣집 둘째 딸의 ‘돌봄’에 대한 고민

2025-12-26
조회수 157

기사 클릭👆 [은평시민신문] <주치의 일기> 

딸 부잣집 둘째 딸의 ‘돌봄’에 대한 고민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 입력 2020.11.15



저는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딸 넷에 제일 아래로 아들이 있죠. 아버지가 종손이었으니 어떻게든 아들을 낳으려고 하셨던 게 사실이기는 하겠지만 부모님은 딸, 아들 차별하지 않고 키우려고 엄청 노력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변에서는 저희 남매를 두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아들 낳으려고 그렇게 딸딸딸딸 낳았어?”


간혹 저에게 직접 말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네가 아들이었으면 너희 엄마 아빠 고생 안 하고 둘만 키우면 되는 건데, 넌 좀 아들로 태어나지 그랬어?”


그걸 제가 어떻게 결정하겠어요. 그런데 세월이 30년 이상 흐르고 보니, 제 부모님께 다섯 남매 키우기 힘들겠다고 했던 이들이 이젠 제 부모님이 부럽다고 합니다. 딸들이 많아서 좋겠다고요. 노후에 믿을 것은 딸밖에 없다고. 딸 많이 낳아 뭐에 쓰냐던 이들이 딸 부잣집 부럽다 하는 걸 보니, ‘돌봄’이 시대의 화두가 되기는 했나 봅니다.


저는 동네에서 왕진을 자주 다니는데요, 뇌경색, 뇌출혈로 반신 마비가 생겨 침대에 누워서만 지낼 수밖에 없는 70~80대의 어르신들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시는 걸 보면 소설이 아닌 현실이기에 더욱 감동적이지만, 그러려면 누군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갈아넣어 전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또 다른 현실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대개 그 돌보는 사람은 딸, 며느리, 아내,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니까요.


동네로 왕진을 다니는 주치의로 바쁘게 살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 어머니는 희귀암을 진단받았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는 중입니다. 명절 준비를 하다 몸살이 난 것 같으니 영양제를 들고 원장님이 친히 왕진을 와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깜찍한 주문에 저는 여느 딸들처럼 대답했지요.


“안 돼, 엄마, 나 오늘 바빠요.”


“너는 맨날 남의 부모한테만 왕진 다니고, 정작 네 엄마는 아프든가 말든 가야? 이거 좀 서운하려고 하네.”


“아이 참, 엄마는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병원으로 차도 몰고 올 수 있잖아. 몸살이라더니 목소리 쌩쌩하시네. 내가 왕진 가는 분들은 다 못 움직이시는 분들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내 일이잖아요, 직업이야 직업!”


그렇습니다, 직업. 저의 직업은 의사이고, 사회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은 제 부모님을 돌보아야 할 때가 오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직업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돌볼 노동자를 고용하고 저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둘러보면 이런 직업이 흔치 않습니다.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임금 격차는, 가족 중 누군가를 돌보아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돌봄을 수행하게 될 이가 누구인지를 정해버리고 맙니다. 나도 먹고 살면서 돌봄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을 받는 직업을, 여성이 가지는 것은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족 돌봄으로 소환된 여성은,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기 때문에 ‘경력단절 여성’이 되어 더 나은 직장을 구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돌봄 경험이 있으니 잘할 거라는 이유로, 어차피 다시 직장을 구하기 힘들 거라는 이유로, 직장을 구해봤자 얼마 못 벌지 않겠냐는 이유로, 돌봄에 한번 들어온 여성은 잘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동네에서 만들어 갈 돌봄의 공동체는 누군가에게 돌봄이 독박으로, 족쇄로 다가가지 않는 돌봄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잘 돌보고 돌봄 받으면서도 더 평등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지, 동네에서 같이 고민해 봅시다.


0 0